치매잡는 이상순 인지교육원
삶과 손맛이 깃든 디딜방아, "티비 좀 보여주세요" 본문
어린 시절, 1972년? 우리 집에는 TV가 없었다. 동네에서 TV 한 대를 가진 곳은 이장님 댁뿐이었다.
저녁이 되면 마을 어귀마다 스며드는 어둠 속에서 아이들과 어른들이 하나둘씩 이장님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작은 흑백 화면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드라마 한 편에 울고 웃던 그때의 우리는, 비좁은 마루마저 축제의 한마당처럼 느껴졌다.
사람은 많고 방이 비좁을 때는 TV선을 마당으로 끌어내어 마당에는 대형 멍석을 깔고 동네분들이 시청하기도 했다. 멍석에 앉아서 졸다가 잠이드는 이웃도 계셨다.

전화를 갖고 있던 집도 이장님 댁뿐이었다. 전화벨이 울리기라도 하면, 이장님은 서둘러 자전거에 몸을 싣고 소식 전할 사람을 찾아 마을길을 달렸다. 바람을 가르며 달려오는 자전거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던 시절이었다. 누군가에게 걸려온 전화 한 통이, 온 마을의 관심과 이야깃거리가 되던 순박한 세상이었다.
드라마 방영 시간이 되면, 우리는 이장님 집 마당에서 “텔레비전 좀 보여 주세요!” 하고 기웃거리곤 했다. 주인집이 문을 열어 “어서 들어오라”라고 손짓하면, 우리는 마치 큰 선물을 받은 듯 신나서 방으로 들어갔다. 주인집은 잠자리에 들 시간이 가까웠지만, 우리는 엔딩 자막과 애국가가 모두 나올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참 미안한 일이다. 하지만 그땐 무언가를 보고 싶고, 듣고 싶고,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이 세상 무엇보다 컸다.
지금은 집집마다 TV가 있고, 누구나 손에 전화 한 대씩 쥐고 다닌다. 텔레비전 구경하려고 마당 앞에서 외칠 필요도, 자전거로 소식을 전해야 할 일도 없다. 방앗간도 마찬가지다. 예전엔 집에서 디딜방아로 고추며 옥수수를 힘겹게 빻았지만, 이제는 방앗간에 가면 금세 한 줌의 수고 없이도 곱게 빻아 온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해결되는 세상이다. 디딜방아로 고추를 빻을 때 매워서 재채기 수시로 했고, 종아리 뒤쪽이 당겨서 주물러가며 디딜방아를 사용했다. 어떤 때는 디딜방아 안에서 고추가 튀어나오면 주워다 다시 짚어 넣다 보면 방아 꽁이에 손 등을 찧기도 하고 아프다고 징징했던 순간도 기억이 난다.
빻을게 소량일 때는 절구를 이용했다.

요즘 아이들 한태 이런 이야기를 하면, 방앗간에 가면 금방 빻을 텐데, 믹서기로 갈지? 왜 그리 일을 만들어서 했냐고 빈정거릴게 뻔하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편리한 시대에 살고 있는지 미처 느끼지 못한다. 불편함이 일상이던 날들을 지나온 우리에게는, 지금의 세상이 더욱 찬란하고 고마울 뿐이다. 비록 그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마음 한구석엔 늘 그때의 온기가 작은 등불처럼 켜져 있다. 그리고 나는 그 불빛을 따라, 오늘도 조용히 그 시절의 추억을 되짚어 본다.
감사합니다.
치매 잡는 이상순 인지교육원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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